[책리뷰]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권, 박경철 지음
옛날만큼 자주 보지 않지만, 그래도 읽고나면 잡생각은 사라지고 더 많은 고민을 안겨주는 책. 오늘 오랜만에 또다시 책을 들었다. 이 책은 100만 독자를 울리고 웃긴 사슴 찡한 삶의 풍경화다. 베스트셀러이고 시골의사 청춘콘서트로도 유명한 박경철님이 지으신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다. 워낙 유명한 분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책을 읽게 된 계기는 역시나 추천때문이었다. 존경하시는 분의 글 속 에서 요즘에는 박경철의사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재밌게 읽고있다는 추천때문에 읽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삶은 연결되어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말한마디로 나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단단했던 마음이 녹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이 책을 읽고나서도 나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하고 또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인생인지 깨달았다. 시골의사의 일기장을 살짝 들여다본다기엔 너무 큰 삶의 무게를 느끼게 되어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사람이 죽고자 하는 결심을 하는 데는 대개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그것이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개선 될 기미가 없을 때, 잠이 들면 잊히지만 눈을 뜨면 다시 그 고통이 엄습할 때 사람들은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판단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경우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 불행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죽고싶어하는 친구가 있다. 그친구가 힘들어할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잘될거라는 이야기밖에 없다. 하지만 그 친구가 아니고서의 그 무게를 내가 감히 알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 친구가 내 곁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면 나는 감히 그 고통을 안다고 할 수 밖에 없고,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거라고 자신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그렇게 이기적이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 자살이다. 그래서 나는 상황히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살아서 희망을 꿈꾸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박경철 의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을까? 나는 이 친구 하나만으로도 가끔 무서운데, 의사는 고통받는 환자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을 볼때 정말 몇 배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올 것 같다. 그래서 의사분들이 존경스럽다.
중환자실에 하염없이 누워 있는 뇌사자에게, 가족의 요청까지 거부하면서 마지막 심자잉 멈추는 순간까지 소위 '치료행위'를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수천만 원의 병원비를 빚으로 안고 남겨지는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의 환자도 결국은 그렇게 퇴원을 했다. 할머니는 당일 치료비에 대한 지불 각서를 쓰고, 한쪽 팔이 없는 40대 아들을 이끌고 병원 문을 나섰다. 평생을 세파에 시달린 탓인지 할머니답지 않은 서늘한 눈빛의 홀어머니와 그라목속의 푸른색에 염색되어 마치 잉크를 마신 듯 입술이 시퍼레진 아들은 위 세척을 하느라 젖어버린 군복 상의를 걸친 채 그 추운 겨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나는 할머니에게 택시타고 가시라고 돈을 건냈지만, 할머니는 그 돈을 주섬주섬 넣으시고는 다시 가시던 길을 갔다.
그모습을 본 수위아저씨는 아까 그 내과 선생도 택시비하라고 주더만, 아마 당신이 준 돈도 그냥 할머니 주머니로 들어갔을 거야. 저 할머니 눈빛 봐. 아마 어딘지 몰라도 집에까지 걸어갈 거야. 할머니는 정말 버스정류장을 지나 지하도를 건너 아들과 함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40대 장애 아들과 칠십의 노모, 그라목손과 아들의 죽음, 그리고 40년간 아들의 수발을 들며 살아야 했던 노모의 증오에 가까운 시퍼런 눈빛, 당장 내일의 끼니와 바꾸어질 택시비. 박경철 의사의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 다 가슴아팠지만, 유독 이 에피소드가 눈을 끈 이유는 내가 모르는 삶에 대해 아는 척 했던 내 자신이 오버랩 되어서 일까? 내인생을 선택하는 것도 골치가 아픈 일인데, 남의 인생은 쉽게 생각해버렸던 지난 날이 떠오른다. 그 친구는 고맙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자신에게는 부끄러웠던 과거가 되기도 한다.
진료를 하다보면 환자들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고학력에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표정이 심각하고, 오히려 소외되고 어려운 분들이 병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바람이 제법 찬 가을 아침에 일자리가 없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근사한 카페에서 코냑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은 표정들이 대개 심각하다. 그러나 안동 막창 골목에서 소주 한 병 시켜놓고 돼지 막창을 굽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떠들썩하고 유쾌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정은 어떨까, 소위 이성으로 해결해야 할 대단하고 복잡한 문제들의 포로가 되어 '고상한 척'하고 사는 사람들은 정신 에너지의 고갈로 뇌 속에 찌꺼기만 쌓여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솔직하게 노동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성적'이라는 이름의 '어색한 노동량'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으로써 뇌 속 기쁨의 센서가 낮게 세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행복의 총량은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은 것일까.
행복이란 어디에 있을까, 소소한 일상속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늘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 갈망이 실제로 채워지지 않았을 경우엔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매일 고군분투하고, 삶은 괴롭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생각하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는 것일까, 여전히 난 답을 찾고 있다.
|